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1개조 요구 (문단 편집) == 위안스카이 야합설과 쑨원 날조설 == [include(틀:토론 합의, this=문단, 토론주소1=GlossyWorriedVulgarManager, 합의사항1=쑨원의 날조 관련 서술을 근거와 함께 서술으)] [[5.4 운동]] 당시부터 최근까지 위안스카이가 일본 제국주의에 굴복했으며 [[홍헌제제]]에 대한 일본의 지지를 대가로 일본과 굴욕적으로 야합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위안스카이가 나름 저항했다는 것이 발굴되면서 처음엔 저항했지만, 안될 것 같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제제 즉위를 받기 위해서 일본과 밀약을 맺었다...라는 식으로들 논지는 유지해서 설명했는데 근래에는 [[쑨원]]이 위안스카이를 음해하기 위해 살포한 날조라는 설이 정설이 되었다. 위안스카이의 21개조 요구에 대한 반응은 매우 격앙된 것이었으며, 일본인 군사고문 반자이 리히치로를 소환해 일본은 중국을 우호국이 아니라 식민지로 여기고 있다고 격렬히 항의하고, 법률고문 아리가 나가오[* 이 시기에 고문 직함 달고있던 사람 중에서 흔치 않게 중국과 위안스카이에게 대단히 우호적이었던 인물. 본래 법학자였는데, 위안스카이의 고문이 되고 난 후에도 계속 법학 연구를 이어 나가며 중국 근대 법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위안스카이가 칭제할 때는 일본 황실을 모델로 삼아 신 중국 황실의 법적 개요를 제공했다. 한편 21개조 요구에 강력히 반대한 후 1919년 고문 업무가 끝나자 일본으로 돌아와 와세다 대학 교수가 되었는데, 이 때도 계속 중국에 우호적인 주장을 펴다가 대중 강경론자들의 공격으로 사직한다.]를 일본에 파견해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도움을 청하는 한편 차오루린 등의 친일 인맥들을 총동원하고, 자신이 직접 외교부 회의에 매일 출석하여 관련보고를 받으며 [[루정샹]], [[구웨이쥔]] 등 친영미 외교관들을 통해서 미국과 영국에 하소연하는 등 전쟁 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다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21개조 요구를 강요한 오쿠마 내각은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에 반대하던 정권으로,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려 하자 무력으로 저지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일본의 군사지원이 절실해서 21개조 요구에도 닥치고 있던 [[러시아 제국]]에서 좀 심하지 않냐고 한마디 할 정도로 막나가던 판이었다. Ernest Young은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려고 한 이유를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할 정도이며 Shan은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위안스카이가 터무니없는 음해를 당했다고 결론 내린다. 정작 위안스카이의 저항은 속임수에 불과하며 황제가 되기 위해 밀약을 맺었다고 주장하던 쑨원은 같은 시기에 일본에 만주를 줄 테니 지원해 달라고 하고 있었다.(...) >No controversy posed a more excruciating headache for Yuan than Japan’s Twenty-One Demands of 1915. Traditional historiography claims that Japan took advantage of the First World War to press China for imperialist gains and that Yuan accepted those demands in exchange for Japan’s support for his monarchical project. Accordingly, Yuan’s acceptance was an act of treason, and his negotiation with Japan was a “dirty deal.” (Jian Bozan, Zhongguoshigangyao [An outline of Chinese history], 145.) >According to scholars’ recent research, that claim originated in Sun Yat-sen’s political propaganda, which soon became accepted as the “ironclad truth.” (Ma Liangyu, “Yuan Shikai yuershiyitiao” [Yuan Shikai and the Twenty-One Demands], 61.) >----- >Patrick Fuliang Shan, Yuan Shikai: A Reappraisal(Toronto: The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2018), 197쪽. [[https://books.google.co.kr/books?id=E1JtDwAAQBAJ&printsec=frontcover&dq=Patrick+Fuliang+Shan,+Yuan+Shikai:+A+Reappraisa&hl=ko&sa=X&redir_esc=y#v=onepage&q=Patrick%20Fuliang%20Shan%2C%20Yuan%20Shikai%3A%20A%20Reappraisa&f=false|#]] 참고. >(...) Lastly, the uprising was precipitated ahead of schedule by the rumor that a secret pact was being negotiated between Peking and Tokyo.36a The rumor, while incorrect, seems to have been related to the recent turn in Tokyo toward recognition, which had been known to Yuan. In view of the confidential nature of the information, how did the Junta know about it? >----- >Kwanha Yim, Yuan Shih-k'ai and the Japanese,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24, No. 1 (Nov., 1964), 67쪽. [[https://www.jstor.org/stable/i309609|#]] 참고. >손문의 이전의 수많은 동료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애국적 중국인들이 원세개가 일본에 저항하는 동안 그를 후원하거나 그를 방해하는 일을 자제하였지만 손문은 다른 편에 서 있었다. "호랑이를 쫓아내고 늑대를 불러들이지는 말라"는 황흥의 경고를 무시하고 손문은 그의 원세개와의 싸움에 계속 우선성을 부여하였다. 황제가 되려는 욕심에 대해 일본의 지원을 얻으려했기 때문에 사실상 원세개가 21개조 요구를 불러들인 것이라는 주장하기는 했지만 손문은 비밀리에 일본측에게 비슷한 특권을 제안하고 있었다. >----- >해롤드 시프린 저, 민두기 역, 손문평전(서울: 지식산업사, 1990) [[https://books.google.co.kr/books?id=fbUwDwAAQBAJ&printsec=frontcover&dq=Harold+Shiffrin&hl=ko&sa=X&redir_esc=y#v=onepage&q=Harold%20Shiffrin&f=false|#]] [[분류:1915년/사건사고]][[분류:북양정부의 역사]][[분류:일본 제국의 중국 침략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